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워드 진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하워드 진은 1922년 [[뉴욕]] [[브루클린]]에서 태어났다. 그의 부모님은 둘 다 이민자였는데 아들을 공부시키고자 [[뉴욕 포스트]]에 돈을 보내 [[찰스 디킨스]] 전집 스무 권을 진에게 주었다. 이를 통해 그는 문학을 알게 되었고 후에 고등학교에 가서는 작문을 배웠다. 청년기가 되면서 그는 좌파 성향을 띄어갔다. 항구에서 근무할 당시, 좌파성향의 친구들이랑 친해졌고, 이 시기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등을 읽었다고. 그러던 중 [[제2차 세계대전]]이 발발하자 진은 미국 육군 항공대에서 폭격수로 복무했다. 폭격 임무를 받은 진은 유럽의 여러 도시를 폭격했는데, 특히 종전 직전인 1945년 [[프랑스]]에서 그가 참가했던 작전은 사상 최초로 [[네이팜탄]]을 사용한 작전이었다. [[네이팜탄]]을 사용한 폭격에 참가했던 하워드 진은 큰 충격을 받았다. 처음에는 독일군 잔당을 제압하기 위해 폭격을 한 줄 알았는데, 알고보니 폭격을 한 곳에는 독일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[[민간인]]들도 있었던 것이다. 그 폭격으로 인해 최소한 1,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하워드 진은 '''"비참한 실수"'''라며 절규하며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. 전쟁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진이 [[반전주의]] 성향을 가지게 했다.[* 이후 하워드 진은 <만화로 보는 미국 역사>에서 당시 그가 투하한 폭탄이 바로 네이팜 폭탄이었고, 유럽전선에서 최초로 사용된 네이팜 폭탄이었다고 한다. 그 네이팜 폭탄은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인을 테러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.] 하워드 진은 1943년부터 폭격수로서 근무했다. 당시 하워드 진은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[[장교]]로서 병사들의 식사시간 동안 질서를 유지하고, 감독하는 일을 맡았는데, 어느날은 [[흑인]]과 [[백인]]의 식사시간표가 잘못되어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고, 어느 백인 병사가 그에게 흑인을 내보내게 해달라고 요구하자, 이 말에 분노하여 흑인을 쫒아줄 것을 요구한 병사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한다. 2차대전 당시 영국에서 490폭격대에 소속되어있을 당시 또 다른 [[B-17]]의 선미사격수를 만났고, 그와의 대화를 통해 [[구소련]]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크게 바뀌었다. 그러나 소련이 준 환멸이 미국이 준 환멸보다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. 이후 그는 역사학 연구를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6년부터 [[스펠만 대학교]][* 역사적으로 유명한 흑인 여성 대학이다.]에서 교수로 근무했다. 스펠만 대학교는 보수적 성향의 흑인 대학교였는데, 그는 몇 안되는 백인 교수로서 진보적인 색채를 보였다. 1959년 하워드 진은 스펠만 대학교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사회적 변화에 관련된 몇 개의 실제적 프로젝트를 실시해보자는 제안을 했고, 그 시작은 공공도서관에서의 인종차별에 맞서는 것이었다. 이후 스펠만 대학도 변했고, '인권을 위한 호소'라는 한 학생지도자의 성명서가 애틀란타 콘스티튜션이란 사문에 전면광고로 게재되었다. 하워드 진은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했고, 흑인들의 투표권과 평등권을 위해 싸웠다. 학교 당국은 그를 탐탁찮게 여겨 1963년 그를 해고[* 당시 하워드 진은 이 학교의 종신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. 그런 교수를 학교가 해고한 것이다. 그의 저서 '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.'에 따르면 학교 총장이 그를 탐탁찮게 여겼다 한다.]했지만 그의 사회운동을 꺾지 못했다.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에 개입하자 하워드 진은 또한 [[베트남 전쟁]]에 맞서 반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. 1968년 [[베트콩|베트남 민족해방 투사]]들이 ‘[[구정 공세|테트 공세]]’를 시작하자 하워드 진은 다니엘 베리건 같은 다른 주도적 활동가와 함께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하여 북베트남 정부측과 협상하기도 했다.[* 만화로 보는 미국사를 보면 그가 북베트남의 팜 반 동과 협상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.] 미국에서 하워드 진은 대니얼 엘스버그의 [[펜타곤 페이퍼]] 출간을 도왔다. 1971년 봄에 전쟁에 반대하는 참전 용사들과 수십만의 시위자들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몰려들었을 당시, [[놈 촘스키]]와 대니얼 엘스버그 그리고 마릴린 영[* 베트남 전쟁을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이기도 하다.]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전시위에 적극 참가했다가, 경찰이 쏜 [[최루탄]]을 맞았고 체포되기도 했었다. 1980년대 그는 명저 미국민중사를 집필하여,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. 또 2000년대에는 [[이라크 전쟁]]에 반대하는 활동도 벌였다.[* 하워드 진의 '만화로 보는 미국사'의 첫 시작이 바로 2003년 [[이라크 전쟁]] 반대 시위에서 강연하는 모습부터 시작한다.] 그는 미국 흑인 최초로 대통령이 된 [[버락 오바마]] 대통령의 친제국주의적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. 2010년 1월 27일에 향년 87세로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